Name 예루리 (2004-09-01 04:59:57, Hit : 2020, Vote : 125)
Subject
제비뽑기 민주주의
노무현 정부의 탄생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그 자체로 스펙타클한 과정이었다.그러나 여기서 나는 한국이라는 특수한 정치공간에서의 '노무현'과 '탄핵'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현실정치 '분석'은 지겹게 접할 수 있었다. 심지어 스포츠신문들도 곧잘 하는 짓이다. 그보다 나는 현상 이면에 있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노무현을 당선시키고 탄핵시킨 대의제 정치와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에 관한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상대적으로 '후지다'는 수준의 비판이 아니다. 나는 감히,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당연시되는 대의제 정치와 민주주의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이기는커녕 최악의 것일 수 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사람들은 대개 "헌법은 좋은데 운용이 잘못됐다"느니 "제도는 좋은데 사람이 문제"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지구상의 국가를 규정하는 대원칙'인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서만큼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표제도' '대의제 선거' 등을 포괄하는 우리의 '일반민주주의'는 당장 수정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형태지만 그보다 나은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능력을 거세시키는 수작일 뿐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노력에 따라 바뀔 수 있으며 우리는 한번도 변화를 체험하지 못했기에 그저 현재의 대의제에 체념한 채 냉소적으로 살아갈 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력을 해방시켜야 한다.
도올의 '구라'엔 내용이 없다
우리시대의 '지식광대'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는 탄핵정국 당시 "민의가 곧 헌법"이라 절규하셨더랬다. 본격적인 논의 이전에 한 가지 분명히 해두고 넘어갈 게 있다. 상당수 사람들이 아직도 탄핵이 '위헌'인 것으로 오해하는데, 사실 탄핵은 거의 '합헌적'인 절차로 진행되었다.(만약 당신이 탄핵을 부정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100% 정치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본인이 그동안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한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에는 검사 변호사 등 법으로 먹고 살던 '율사' 출신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 그들은 결코 충동적으로 탄핵을 추진한 게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평균지능이 닭에 가깝다는 것이 '상식'이긴 하지만,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할 상식은 '닭들은 자살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탄핵추진세력에겐 처음에는 나름의 승산과 명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헌법상의 절차대로 진행된 탄핵이었기에 탄핵을 부정하려면 도올은 당연히 헌법을 부정해야 했다. 따라서 "민의가 곧 헌법"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게다.
하지만 도올이 말한 '민의'라는 말처럼 모호한 말이 어딨을까. 또는 대체 몇 퍼센트의 국민들이 속해야 민의라 부를 수 있을까. 90%? 70%? 아니면 50.1%? 도올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민의'라는 말로 은근슬쩍 비켜가고 있다.
히틀러도 압도적 '민의'에 의해 당선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결코 히틀러의 재림을 막아낼 수 없다. 히틀러 시대의 선거제도와 우리 시대의 선거제도는 근본적으로 똑같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들의 의식수준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문제이다. 이것은 순전히 논리적인 문제다.
근대의회제의 기묘한 모순
가라타니 고진의 저서 『일본정신의 기원(원제:일본정신분석)』의 3장 「투표와 제비뽑기」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논리적 모순에 대한 것이다. 물론 노무현이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고진은 기쿠치 칸의 소설 「투표」를 통해 현대 대의정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다. (기쿠치 칸의 소설도 재미있지만,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생략한다.) 고진의 주장은 상당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억지로 압축하자면 "고대 아테네에서처럼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선출하자"는 것이다. 제비뽑기라고? 느닷없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허탈한 심정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고진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과정에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근거가 있다.
고진이 보기에 민주주의의 근간인 보통선거와 비밀선거의 원칙은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킨다. 바로 '대표되는 자'와 '대표하는 자' 사이의 엄청난 괴리다. 보통선거라는 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특정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제한선거를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하는 것이다.
소수 귀족 혹은 대지주들의 지배에 치를 떨던 소부르주아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이 보통선거를 도입하는데 필사적이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인구로 따지면 귀족이나 지주들이 아닌 사람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선거가 실시되면 이론상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계급이 다수파 정당이 되는 게 당연하다. 부르주아나 귀족들이 목숨걸고 보통선거 도입을 막았던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즉 보통선거 및 비밀선거 하에서는 모든 계급을 대변하는 대표들이 뽑힐 것이라 예상됐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선거에 대한 간섭을 막자는 취지에서 도입된 비밀투표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고, 노동자계급은 압도적인 인구에도 불구하고 소부르주아계급보다 적은 표를 얻게 되었다. 대표자로 뽑힌 사람은 누가 자신에게 투표했는지 비밀에 부쳐졌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정치를 하게 됐다. '대표성'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의 제한선거보다 훨씬 열등한 제도가 되어버린 셈이다. 분명 선거는 유권자의 대표를 뽑는 것인데 유권자가 누구를 대표자로 뽑았는지, 또는 대표자가 누구의 대표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은 고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으로 "기묘한 것"이었다.
각 지역의 대표를 뽑는 한국의 선거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대표로 뽑힌 국회의원은 지역민들의 의사에 구속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 국회의원이 '배은망덕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근대 의회제의 본질"이며 법에 규정되어 있는 사항이다.
"의회는 유일무이한 국민의 대표기관이며 국민은 자신의 의사를 '의회에서만, 그리고 의회를 통해서만' 관철시킬 수 있다. 근대의회는 '국민에 대한 독립선언'이며 의회가 '명령적 위임'에 구속당하며 투표자에 대해 책임을 지던 예전의 신분대표 의회와 명확히 구분된다"
(한스 켈젠, 독일 바이마르 시대의 헌법학자. 한국 헌법 역시 바이마르헌법에 기초해 만들어졌다.)
얼마전 유시민 의원이 "지역민들 요구에 구속당하지 않는 의정활동을 하겠다"고 '용감하게' 선언한 것은 다 이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인의 주도면밀함
가라타니 고진은 바로 이런 근대의회제의 본질 때문에 국민들의 의회에 대한 불신이 자연스레 생겨나고, "모든 사람들의 박수갈채 속에 등장하는 독재자"가 출현하길 바라게 된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나폴레옹의 조카라는 사실 외에는 백수건달에 불과했던, 그러나 계급을 초월해 모든 국민을 대표하겠다고 '뻥'을 친 덕에 황제가 된 루이 보나파르트다. 그리고 훗날의 히틀러도 비슷한 경우였다.
고진은 그래서 고대의 아테네를 오늘로 불러들인다. 아테네에서도 비밀투표가 있었으며 광장에 시민들이 모두 모여 '민회'를 열고 모든 시민들(여자와 노예는 제외)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는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가 오랜 세월 유지된 것에는 이런 것들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추첨, 즉 제비뽑기다.
"민주정은 의회에 모여 의견을 말하는 것 따위가 아니라 행정과 사법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강제나 종용, 교사, 매수도 통할 수 없는 뭔가를 개재시켜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연성이다."
(고진, 『일본정신의 기원』 133쪽)
고진에 따르면 아테네가 직접민주주의의 산실이라 불린 것은 시민들이 광장에서 민회를 열거나 투표에 참가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제비뽑기를 통해' 국가의 관리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국가의 관리를 제비뽑기로 선출하고 마찬가지로 제비뽑기로 선출된 배심원이 있는 탄핵심판소를 통해 권력을 철저히 감시했다.
아테네 사람들이 이런 '지독한' 시스템을 고안한 것은 폭군으로 돌변해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던 '참주'tyrant를 경험한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이런 권력이 등장하지 못하기 위한 주도면밀한 장치가 바로 '우연성' 즉 '제비뽑기'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애초부터 '인간의 선한 본성' 따위를 믿지 않았기에 이런 제도를 고안해냈다. 개개인이 아무리 선하더라도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성'이 변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진은 당연하게도 '중우정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시쳇말로 '개나소나' 권력자가 될 수 있다면 전문성이 필요한 직책에 문외한이 들어가 일을 망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고진은 자신도 당연히 능력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타협책을 제시한다. 즉 일정하게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후보군으로 선발한 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제비뽑기로 지도자를 선출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거+추첨 방식으로 하면 현대정치에서 가장 큰 해악이라 할 관료지배와 중앙집권주의를 막을 수 있다고 고진은 주장한다.
고진의 말처럼 오늘날의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의회가 국민을 대표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삼권분립에 의한 권력들간의 견제는 그야말로 허구에 가깝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핵심적 관료 또는 '모든 계급을 대변하는 척' 하는 소수 정치인과 그들과 손잡은 다국적 자본가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회는 '국민들을 제대로 대표하지도 못하면서' 4년 동안 권력을 휘두르는 것 외에 거의 하는 일이 없다. 아니 설사 그들 중 일부가 뽑아준 유권자를 대변하고 싶어도,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제도 자체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
노무현과 보나파르트
내가 노무현의 당선에서부터 느껴오던 '기묘한 데자뷰(deja vu)'가 탄핵사태에 이르러 명료한 하나의 이미지로 확실하게 응고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런 정치적 능력도 입증하지 못한 덜떨어진 사내가 유럽 최고의 지성들과 혁명적 민중들이 득실거리던 프랑스의 '황제'로 등극한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한번 보라.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불세출의 걸작으로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해내고 있다.
나는 '관상만 서민'이고 '정책은 부르주아'인 노무현 정부를 1년 넘게 경험했다.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 과정은 보나파르트의 그것처럼 드라마틱하고 눈물겨웠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 아니었던가. 서민들을 대변하고, 국가보안법도 철폐하고, 나라경제도 살리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도 만들겠다는 식의 '모든 계급을 아우르는 전략'으로 기적처럼 대통령이 된 노무현. 그는 한국에서 '보나파르티즘'이 어떻게 먹힐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2003년 말에는 난데없이 재신임 투표를 하자고 해서 사람들 어안을 벙벙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실 그 때 보나파르트를 떠올린 사람들이 일부 있었다. 구체적인 정책에 대한 국민투표가 아니라 지도자 자신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을 플레비사이트라고 하는데, (당연하게도 위헌인) 이 플레비사이트를 실천한 것이 바로 루이 보나파르트였다. 지금 노무현 정부가 하는 짓을 한번 보자. 정부관료가 멀쩡한 얼굴로 "골프장을 많이 지어야 경제가 산다"고 말하거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해서 집 장만 좀 하게 해달라는 국민들을 대통령이 반시장주의자로 매도한다. 이 노무현 정부를 보면서, 나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한국에서 환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져든다.
선거 때만 되면 튀어나오는 '비판적 지지'의 망령도 이젠 지겹다. '인물론'에 매달리다 실망하는 것도 신물이 난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정치를 그렇게나 혐오하면서도 선거 때만 되면 '인물'에 매달린다. 그러나 정치인들, 그들은 대체 누구의 대표자인가. 루소의 말처럼 우리는 투표 당일날만 주권자일 뿐이다. 이제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항상 같은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가 되었다. 그간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이회창이냐 노무현이냐 혹은 박근혜냐에 멈춰서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제안'은 황당하지만, 굳어진 머리를 두들겨 부수는 효능이 있다. 생각해보면, 대통령을 '사다리'로 뽑는 것도 좋지 않은가. 자신의 권리를 대리자에게 위임해버리고 나중에 불평이나 일삼는 풍경에 비하면 말이다.
예루리 이 글을 끝으로 저의 게으른 칼럼질을 끝내야겠습니다.
앞으로 쪽글이나 해우소에서 뵐게요.^^ 2004/09/01
ㅠ ㅠ 아쉽네요....
게으르긴 해도 꾸준히 써줬으면 하는데
뭐 그거야 저의 바램일 뿐이겠죠
이때까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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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콥트기독교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