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2006년은 개띠 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
김종희(jhkim) [조회수 : 249]
2006년은 술년, 개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개판’을 벌여 돈 좀 벌어보겠다고 바쁘게 준비하는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연예계나 운동계에서는 벌써부터 ‘개띠 스타’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허한 말들을 쏟아낸다. 개띠 고객 우대 행사, 개띠 고객 토정비결 봐주기, 애견용품 할인 판매, 삽살개와 함께 사진 찍기, 애견 전시회, 애견 무료 건강 검진 등 이벤트를 기획해, 개와 개 주인을 설레게 해주는 곳은 백화점들이다. 개 가지고 돈 버는 것을 마냥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그래도 ‘개’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하지 않겠나 싶다. “개야, 넌 누구니?”
올 여름에 만난 개의 이름은 보리다. 이 녀석은 김훈이 쓴 소설 <개>의 주인공이다. 자신을 낳아준 어미는 개장수에게 팔려가고, 주인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골 고향 마을은 물에 잠겼다. 주인 노인의 둘째 아들을 따라간 곳은 바닷가 마을. 새로운 고향에 잘 적응한 보리는, 동네 꼬마 아이들을 좇아 학교도 다니고, 자신보다 덩치가 크고 사나운 개와 싸움질도 하고, 매력적으로 생긴 암놈에 홀려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기도 했다. 새 주인의 배는 앞바다에서만 고기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작았다. 주인이 바다에서 돌아오면 보리는 배의 밧줄을 입으로 물어서 밧줄 고리를 쇠말뚝에 거는 일을 했다. 어느 가을 고기떼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해서 난바다로 나갔던 주인은 썩은 시체가 되어 돌아왔다. 보리는 한동안 주인의 무덤 옆에 웅크리고 주인 곁을 지키는가 하면, 자신이 연모하는 암놈이 인간들에게 몽둥이질을 당해 피똥을 싸면서 죽어가는 모습도 보았다. 보리는 인간과 개의 갖은 아픔과 슬픔을 새카맣고 굳은살 박인 발바닥으로 받아내면서 인간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었다.
일주일 전 월요일 지하철 혜화역 안에서 만난 개는 안내견이다. 이 녀석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젊은 남자의 눈이 되어서 함께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주인 곁에 바짝 붙여서 주인의 움직임에 조심조심 자신의 걸음을 맞추었다. 사람이 많아 복잡해진 복도를 갈 때에는 한쪽 옆으로 주인을 이끌어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했다. 어쩌면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게 하려고 배려한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는 주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잠시 쉬는 녀석의 눈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약간 풀린 것처럼 보였다. 피곤해서 그럴까.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이 지겨워서 그럴까. 이 역시도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일까. 개찰구를 지날 때 자신이 먼저 지나가야 할지 주인이 먼저 지나가도록 해야 할지 순간 혼란스러웠는지, 먼저 지나가려다 말고 주춤한다. 복잡한 복도에서 한쪽 길로 주인을 인도하는 모습과 졸린 듯 반쯤 풀린 눈은 안내견의 일생을 보여주는 순간사진처럼 내 마음에 찍혔다. 태어나자마자 안내견으로 정해지고, 철저한 훈련을 받아 한평생 인간의 눈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개. 잘 짜인 프로그램대로 정확하게 움직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무료함을 견디기는 힘들어 보였다.
안내견을 보면서 거의 동시에 며칠 전 인터넷으로 본 끔찍한 사진들이 떠올랐다. 경북 포항에서 맹견 한 마리가 사육장을 뛰쳐나와 초등학교 화장실에 있던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 달려들어 머리와 얼굴을 처참하게 물어뜯었다. 아이는 두개골이 훤히 보이고, 귀가 완전히 떨어져나갔으며, 눈물샘과 침샘을 다시 쓸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을 심하게 다쳤다. 사고 전의 귀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전남 신안에서는 집에서 기르던 개가 여덟 살배기의 목을 물어 죽였다. 경기도 의왕에서 도사견이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살던 아홉 살배기 아이를 물어 죽인 사건으로 세상이 시끌벅적했던 바로 며칠 뒤에 벌어진 일들이다. 약한 아이들을 물어 죽인 개들의 눈매가 어떤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났다. 우리 동네를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녀석도 성깔이 만만찮아 보이는데, 설핏 우리 아이들이 걱정됐다.
올해 만난 개들은 인간과 함께 희로애락을 겪는 반려자, 인간의 눈이 되어주는 안내자, 연약한 인간을 물어뜯는 포학자들이었다. 혼란스럽다. 개의 여러 모습은 다 인간과의 관계에서 떠오른다. ‘개와 인간.’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개 같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당신의 주먹은 그 누군가의 얼굴을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한국 사람이 아니고 스웨덴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말고,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땡큐” 하고 한 마디 인사를 건네라. 국내에서 상영된 적이 있는 스웨덴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에서 ‘개 같다’는 말은 우리말로 ‘아름답다, 좋다’는 정도의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개를 유난히 사랑해서 개 유치원까지 운영하는 나라이고 보면 그럴 법하다. 고대 희랍에서 세상의 관습과 편견을 거부하고 자유롭고 단순한 삶을 추구했던 자유인 디오게네스는 동시대 철학자들에게 ‘개 같은 철학자’로 불렸다. 이쯤 되면 ‘개 같다’는 말이, 영화 <똥개>에서 똥개처럼 빈둥거리면서 시간을 죽이는 한심한 주인공 철민이 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여기고 안심해도 좋겠다.
이 정도 사전 이해를 구했으니,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다. “개같이 살라”고 말해주고 싶은 대상이 둘 있다. 하나는 목사고 하나는 나다.
흔히 예수님은 목자장, 목사는 목자라고 한다. 그 해석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성서 해석을 전문하는 하는 학자들에게 맡길 일이고, 내 상식으로는 목사를 목자라고 하기보다는 ‘양몰이 개’라고 해야 맡은 역할에 적확하지 않을까 싶다. 외국 영화를 보면, 목동이 어슬렁이면서 휘파람으로 개에게 신호를 보내면 개는 우왕좌왕하는 양떼를 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보통은 한 마리가 아니고 몇 마리의 개가 협업해서 노련하게 양떼를 몬다. 양들이 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순순히 가면 개들은 그 틈에 잠시 엎드려 혓바닥을 내놓고 숨을 고른다. 그러다가 양 몇 놈이 엉뚱한 곳으로 삐치면 개들은 냅다 튀어 올라서 순식간에 제압한다. 보통 실력이 아니다. 양떼들이 우리에 다 들어갈 때까지 개들은 방심하지 않는다. 한 마리의 양도 남김없이 우리에 들어가면 그제야 온전한 휴식이 주어진다. 갈한 목을 물로 축이고 주인의 쓰다듬음도 즐긴다. 자기들끼리 장난도 친다. 날이 밝으면 또 양들이 헛짓하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야 한다. 이런 장면을 보노라면 내가 기대하는 목사의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근데 목사가 목자 노릇하면 누가 양몰이 개 노릇을 하지? 전도사가 해야 하나?
10년 넘게 기자라는 직업으로 먹고사는 나는 개처럼 살고 싶다. 도사견도 아니고, 애완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내견이나 양몰이 개가 될 실력은 없지만, 감시견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감시견의 깜냥은 도둑이 담을 타 넘으려 할 때 왈왈 짖는 것이다. 개가 짖으면 주인이 벌떡 일어나 도둑을 때려잡든지 도둑이 제 사명을 포기하고 도망하든지 둘 중 하나다. 도둑이 집안에 들어가 물건 훔치는 것을 막을 책임까지 개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도둑이 물건 훔쳐갔다고 화가 나서 개를 두들겨 패거나 걷어찬다면 그런 몰상식한 주인은 물어도 된다. 하지만 개는 목이 터져라 최선을 다해 짖어야 한다. 주인이 듣든지 못 듣든지 짖어야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다른 것은 다르다고 짖어야 한다. 도둑이 슬쩍 던진 미끼에 홀라당 정신이 팔려서 군침을 질질 흘리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면, 그건 똥개지 감시견이 아니다. 그런 개는 두들겨 맞거나 걷어차여도 할 말이 없다. 기독교 언론의 기자는 가짜 믿음과 엉터리 행태가 교회에 침입하는 틈이라도 보이면 짖고 또 짖어야 한다.
2006년 개해에는 개가 인간을 물어뜯고 인간이 개를 때려죽이는 끔찍한 장면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대신 어리석은 양들을 우리로 몰아주는 개, 도둑을 감시하는 개, 앞 못 보는 사람을 안내하는 개가 판을 치는 한 해가 되면 좋겠다.
2005년 12월 31일 09:5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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